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고어 멘델 (문단 편집) == 생애 == 멘델은 1822년 7월 20일,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관령]]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 [[체코어]]로는 힌치체(Hynčice)라고 한다. 지금의 체코-폴란드 국경에 있는 흐라데츠크랄로베 주 나호트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소작농]]인 안톤 멘델(Anton Mendel 1789-1857)과 로지나 멘델(Rosine Mendel)의 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유소년, 청소년기 시절부터 부모님, 동생들과 함께 농사와 원예 일을 도우며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멘델은 본래 자연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17살 때 아버지가 일을 하던 중 크게 부상을 입고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공부에 매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으나 당시 여동생인 테리지아 멘델(Theresia Mendell, 1783 ~ 1875)와 누나인 베로니카 멘델(Veronika Mendel)이 학비를 대준 덕에 전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멘델은 진학 이후에도 학비 문제로 계속해서 고생했다. [[수도회]]에 입회하면 금전적인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브르노|브륀]](Brünn)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고 [[수도자|수사]][[신부(성직자)|신부]]가 되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몇 번씩 교원 자격증에 도전했지만 생물 관련 점수가 부족해서 낙방했다고 하며[* 시험을 칠 때마다 긴장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학문에 관심과 열정이 식지 않아 대학에서 청강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때 수도원장이자 정치인이었던 시릴 프란티셰크 나프(Cyril František Napp, 1792 ~ 1867)의 추천서가 재미있는데, "멘델은 사제 일은 서툴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출중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참고로 냅 수도원장도 중고등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 봉사활동을 하곤 했다. 멘델은 [[농부]] 집안 출신에 어머니의 외가가 원예가 집안이었기 때문에, 원예 및 육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인공수분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원예사]]나 [[육종가]]들을 난감하게 했던 '''부모세대에 없던 형질이 왜 자식세대에 나타나기도 하는가''' 하는 주제[* 지금은 중학생도 아는 우성과 열성 유전 내용이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학 수업을 청강하는 동안 [[자연과학]] 및 [[통계학]] 등의 지식도 배울 수 있었는데, 이것은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족으로 이때 멘델의 물리학 스승은 [[도플러 효과]]로 유명한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요한 도플러(Christian Johann Doppler, 1803 ~ 1853)였다. 대학 청강 도중 멘델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접하고는, [[수도원]]에서 진화론을 증명할 실험을 하고자 수도원 뜰에 [[완두]]를 심었다. 처음엔 [[쥐]]로 연구하려 했으나 수도원이 온통 쥐로 가득 찬 모양새가 나올 수 있어 지역 [[주교]]와 오스트리아 가톨릭 교회의 결사적인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반면 완두는 수도원 뒤편에 이미 무수히 자라고 있었고 이를 관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쁠 것도 없었기에 당시 수도원장이 수도원 밭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온실]]도 만들어 주었다.[* 딱히 멘델만 우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인이자 수도원장 시릴 나프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베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멘델이 유전 연구로 완두를 고른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멘델 사후 유전학이 발달한 이후에야 밝혀진 것으로 멘델이 유전 연구로 완두콩을 고른 것은 순전히 환경에 따른 우연이었다. 만약 [[분꽃]] 같은 것을 골랐다면 [[불완전 우성]]이라는 예외 때문에 연구가 진척되지 못했을 것이다. 멘델은 이후 8년 동안 [[완두]]를 심고 관리하며 실험한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식물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학계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학계에서 무시당했다. 멘델의 본업이 [[수도자]]인데다 학력도 대학 중퇴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현대로 따지면 [[생물교육과]]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취업한 회사원의 독자연구, [[유사과학]]쯤으로 취급됐다. 하물며, 당시에도 막 발표된 [[진화론]] 문제로 격렬하게 싸우던 [[가톨릭]]의 [[성직자]]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논문을 몇십 부 인쇄하여 당대의 과학자들에게 보낸 적도 있지만 [[무시]]/[[기각]]당했고, 논문을 받아본 학자들도 뜯지도, 읽지도 않고 내버려두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멘델은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에게도 편지를 보냈으나, 다윈은 멘델의 편지를 읽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당시 생물학자들이 [[수학]], [[통계학]]적인 해석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의 일화에서 보듯 간단한 수학공식으로 풀 수 있는 자연법칙을 발견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당대 과학계에서는 생물학을 자연과학이 아니라 우표수집학으로 봐야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 결과에 놀라면서도 그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 20세기 들어서야 재평가되었으니 시대를 몇십 년은 앞선 연구였다. 사실 멘델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로는, 멘델 자신이 너무 소심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발견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았던 점도 크다. 멘델은 스위스 식물학자 카를 빌헬름 폰 네겔리(Carl Wilhelm von Nägeli, 1817 ~ 1891)하고만 학술적으로 교류하였는데, 네겔리는 멘델의 발견에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멘델이 직접 실험해 보라면서 완두콩을 보냈지만 건드리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조밥나물을 가지고 한 실험에서는 완벽하게 실패해 쓰디쓴 좌절감을 맛보았고 이후로는 그냥 수도원장으로 살았다는 점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멘델은 [[과학자]]라기보다는 평범한 [[수도자]]에 가까웠고 매우 뚱뚱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모두 멘델을 인심 후덕한 신부님으로 대했다고 한다. 비만의 원인은 [[수도원]]에서 식사가 너무 잘 나와서였다. 당대 환경상 농부 집안 아들이 처음부터 뚱뚱할 리가 없다. 가톨릭교회에서도 학위도 없고 연구실적도 인정받지 못한 멘델의 완두콩 연구는 그냥 수도자의 원예 취미나 엉뚱한 연구 정도로 여겼다. 생물학자로서는 극히 일부의 인물을 제외하면 인정받지 못했지만, [[기상학]]이나 [[원예학]]에서는 당대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수도원을 강타한 회오리바람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최초로 역방향 [[토네이도]]에 대한 관찰기록을 작성했다고 한다.], [[사과]]와 [[배(과일)|배]] 품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멘델은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장이 되면 조카에게 보낼 학비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시간강사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실험할 시간이 늘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대수도원장으로서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도원]] 세금징수법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겼으며 재산을 차압당했다. 그러던 중, 평소 몸이 약했던 데다가 여러 가지 문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줄담배]]를 피워대던 그는 1884년 1월 6일, 만 61세 나이에 만성 신장염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한편 멘델이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은 후임 수도원장은 멘델이 8년간 혼신을 다한 실험결과, 논문, 연구자료와 자산들 대부분을 유족들에게 넘기지 않고 불태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